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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궁(palaces)/운현궁4

13.10.31 운현궁 이로당 1866년 노락당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치러진 이후, 노락당을 안채로 사용하기 어려워지게 되어 1869년(고종 6)에 새로운 안채로 이로당을 짓게 되었는데 정면이 8칸, 측면 7칸으로 되어 있다. 운현궁의 가장 왼쪽에 위치한 건물로서 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여자들만 살 수 있게 별도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철저한 금남지역으로 바깥 남자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미음(ㅁ)자 모양으로 만들어 졌다. 이로당의 안주인이 운현궁 전체 안살림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2017. 2. 20.
13.10.31 운현궁 노락당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 정면 10칸, 측면 3칸 규모이다. 1866년(고종 3) 삼간택이 끝난 후 명성황후가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자 고종과 명성황후의 결혼식인 가례가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노락당은 초익공 양식의 사대부가 건축미를 느낄 수 있으며, 아름다운 창살문양(불발기창호)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붕의 용마루를 받치고 있는 중도리에는 용문양이 그려져 있어 건물의 권위와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던 고종이 대체학 김병학에게 '노락당기'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했던 사실만으로도 노락당이 상징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병학은 노락당이 높아 하늘과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 된다고 했는데,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 2017. 2. 20.
13.10.31 운현궁 노안당 운현궁의 사랑채로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이며 처마 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단 수법은 그 시대적 특징이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거처한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 되었던 역사적 장소이다. 노안당의 상량문이 1994년 5월 27일 보수공사 당시 발견되었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노안당'이란 이름은 공자가 '노자를 안지하며'라고 한 논어의 글에서 인용한것으로 대원군이 아들이 왕이 되어 자신의 노년을 편안하게 살게 되어 흡족하다는 뜻과 노인들을 편하게 모셔야 한다는 치국의 이념을 갖고 있다. 2017. 2. 20.
13.10.31 운현궁 운현궁은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이 등극하기 전에 살았던 잠저로서, 생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집이다. 흥선대원군은 이곳을 무대로 10여 년간 집정하면서 어린 아들을 대신해서 정치를 했다. 서운관이 있던 고개에서 유래된 지명을 따서 운현궁이라 불렸다. 1864년(고종 1)에 노안당과 노락당을 짓고, 1869년(고종 6)에는 이로당과 영로당을 세웠다. 창덕궁을 쉽게 드나들도록 고종 전용 경근문과 흥선대원군을 위한 공근문을 두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1912년에는 양관을 세워 손님을 맞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논의하던 곳이며, 노락당은 안채, 이로당은 별당으로 쓰였다. 그 규모나 격식, 평면 모양으로 볼 때, 사대부 집이라기 보다는 궁궐 내전에 가깝다.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 2017.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