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 마법 같은 일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긴 시간의 아쉬움을 한 번에 날린 이재가 이번에는 월드컵에 주제가 DNA를 부르는 가수로 등장했다. 드라마라고 해도 이 정도면 너무 주인공에게 몰아준다고 할 정도로 압도적인 서사다. 노래가 좋아서 몇 번 듣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이재의 분량이 많았으며 심지어 한글 가사도 있다. 북중미 월드컵. 당연히 영어가 언어의 중심이고 그다음이라 해도 유럽의 언어인 캐나다의 프랑스어(캐나다의 공동 언어이자 퀘벡 주 중심 언어), 멕시코의 스페인어(멕시코뿐만 아니라 미국의 제2 언어)가 나와야 한다. 그런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한국인 이재가 등장했고 한글 가사가 들어갔다. 그래서 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지금 미국은 월드컵을 선택했을까?
월드컵 주제곡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이 오프닝 이벤트는 문화적 관점에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담는다. 우선 '이재'는 한국 사람이지만 미국의 시스템인 넷플릭스를 통해서 세계적 인기를 끌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전무후무한 상업적 흥행과 함께 주토피아 2 같은 미국의 전통적인 콘텐츠를 이기고 98회 아카데미에서 장편 애니메이션 상과 주제가 상을 수상했다. 단순한 상업적 흥행을 넘어 미국 문화 주류의 인정까지 끌어낸 것이다. 그 문화적 다양성의 상징인 한국인 '이재'가 월드컵 주제곡을 불렀다는 것은 이 월드컵이라는 이벤트가 넷플릭스와 같은 포맷으로 진화하길 바라는 바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은 바로 '미국'이다.
미국의 축구 굴기
지금까지 미국은 스포츠 강국이기는 했으나 축구 강국은 아니었다. 미국 하면 떠오르는 스포츠를 생각해 보면 미식축구와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다. 이 리그에 축구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제 이 4대 스포츠를 5대 스포츠로 늘려보고자 대대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환점은 바로 2026 북중미 월드컵이다.
1. 인프라 및 월드컵 연계 투자(약 20억 달러 이상)
- 경기장 및 교통 혁신: 미국 내 개최 도시들은 월드컵 인프라 확충과 경기장 개보수, 대중교통 연계 시스템 구축에만 20억 달러(약 2조 7,000억 원) 이상을 쏟아부었다.
- 유소년 및 생활 체육 육성: 미국축구연맹(USSF)은 이번 월드컵을 통해 얻게 될 약 1억 달러(약 1,300억 원) 규모의 배당금 유입을 활용하여 잔디 구장 확충, 유소년 아카데미 시스템 고도화 등 대대적인 인프라 유산(Legacy)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2. 프로리그(MLS)의 폭발적 성장과 체질 개선
- 시청률 및 관중 폭증: 메시 영입 효과와 월드컵 특수가 맞물리며, 2026 시즌 초반 3개월 동안 프로축구 메이저리그사커(MLS)의 주간 시청자 수는 전년 대비 62% 급증한 평균 790만 명을 기록했다.
- 글로벌 스탠다드 전환: MLS는 다가오는 2027년 여름부터 기존 '춘추제(봄~가을)' 시스템을 유럽과 동일한 '추춘제(가을~이듬해 봄)' 일정으로 전격 전환한다. 이를 통해 유럽 이적 시장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세계적인 톱클래스 선수를 더 쉽게 영입할 계획이다.
- 신생 구단 창단: 2025년 '샌디에이고 FC'가 합류하며 리그 규모가 30개 팀으로 확대되었고, 시장 가치는 수년 내 32개 팀 체제까지 확장을 내다보고 있다.
3. 글로벌 축구 자본의 '미국화'(Americanization)
- 유럽 명문 구단 인수: 미국 거대 자본(사모펀드 및 자산가들)은 자국 리그 육성을 넘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의 아스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을 비롯해 이탈리아 세리에 A의 인터밀란 등 유럽의 40개가 넘는 명문 구단 지분을 공격적으로 인수하며 세계 축구의 돈줄을 쥐고 흔들고 있다.
- 상업적 모델 이식: 미국 자본은 축구에 할리우드식 하프타임 쇼,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결합해 축구를 ‘가장 수익성 높은 비즈니스 모델’로 재편하고 있다.
보통 MLS 성장 이야기를 하면 '좋은 선수 영입 → 리그 성장 → 관중 증가'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은 원래 스포츠를 그렇게 키운 적이 없다. NFL, NBA, MLB 등 이런 리그들은 단순 스포츠가 아니다. 미국은 스포츠를 문화로 만들고 문화를 산업으로 만들고 산업을 국가 서사로 만든다. 이걸 반복해 왔다. 그래서 MLS도 단순 축구 리그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 플랫폼 후보일 수 있다.
중동과는 또 다른 접근 방식
하지만 이건 중동 국가들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석유 다음의 국가를 지탱할 것들에 대한 고민으로 접근하고 있다. 중동의 축구가 '국가 주도형 정치·외교적 프로젝트'라면, 미국의 축구는 철저하게 철저한 시장 논리와 전 세계 콘텐츠 시장을 장악하려는 '민간 자본 중심의 상업적 비즈니스'적 측면이 있다.
1. 투자 주체와 목적: 국권 강화 vs 민간 수익
- 중동 (국가 주도 오일머니): 사우디의 국권펀드(PIF)나 카타르 투자청(QIA) 등 정부가 직접 자금을 집행한다. 목적은 석유 의존 경제에서 벗어나고, 인권 침해국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스포츠워싱(Sportswashing)'과 외교적 영향력 확대다.
- 미국 (민간 사모펀드·월스트리트): 정부 자금이 아닌 캘리포니아, 뉴욕의 대형 사모펀드, 자산운용사, 실리콘밸리 자본이 움직인다. 이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축구라는 킬러 콘텐츠를 통해 시청률을 높이고 전 세계적인 '수익(Return on Investment)'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2. 가치 사슬 점령 방식: 리그 통째로 사기 vs 금융 시스템 지배
- 중동 (빅네임 수집과 외연 확장): 호날두, 네이마르 등 전성기가 지나거나 당장 이름값 있는 스타들을 천문학적인 연봉으로 사우디 리그로 끌어오거나, 뉴캐슬 유나이티드 같은 유럽 구단을 통째로 인수해 단기간에 명성을 산다.
- 미국 (지적재산권과 미디어 인프라 장악): 당장 눈앞의 선수 영입보다 애플 TV(Apple TV)와 MLS의 10년 미디어 중계권 계약처럼 미디어 유통망을 선점한다. 유럽 명문 구단들의 지분을 쪼개어 인수해 경영권을 쥔 뒤, 미국식 스포츠 마케팅과 데이터 분석 시스템을 이식해 구단 가치를 띄워 되파는 금융 기법을 쓴다.
3. 지속 가능성과 시장 기반: 인위적 부양 vs 거대한 자국 소비 시장
- 중동 (위에서 아래로): 자국민들의 축구 열기나 유소년 기반이 약하더라도 왕실의 명령과 자금력으로 리그를 인위적으로 부양한다. 투자 기준이 정치적 목적에 치우쳐 있어 정권의 기조가 바뀌면 자본이 순식간에 빠져나갈 리스크가 있다.
- 미국 (아래에서 위로): 이미 미국 내 유소년 축구 인구(등록 선수만 수백만 명)와 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히스패닉 인구의 급증과 젊은 세대의 축구 선호도를 확인한 자본가들이 "이미 형성된 거대한 소비 시장"에 들어와 판을 키우는 형태라 구조적으로 매우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하다.
MLS에 더해지는 One more thing
여기서 중요한 것이 등장한다. 탑건 매버릭, F1 더 무비, 록키, 카, 머니볼 등 미국에서 흥행한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한물간 베테랑 → 재능 있는 신인 → 충돌 → 공동 목표 → 성장 → 상호 존중 → 승리
바로 이것이다. 미국은 수십 년 동안 이 구조를 반복해왔다. 즉, 미국은 축구를 미국식 영웅 서사 안에 넣을 수 있다. 단순히 90분짜리 공차기 게임을 넘어 "한물간 베테랑과 재능 있는 신인의 충돌, 그리고 동반 성장"이라는 흥행 공식을 축구에 고스란히 이식할 수 있는 것이다.
- 한물간 베테랑(The Veteran): 리오넬 메시, 올리비에 지루, 마르코 로이스유럽 무대의 정점을 찍고 황혼기에 접어든 레전드들이 MLS로 넘어온다. 이들은 '탑건: 매버릭'의 매버릭(톰 크루즈)이나 'F1 더 무비'의 소니 헤이즈(브래드 피트) 같은 존재다.
- 재능 있는 신인 (The Rookie): 미국 출신의 젊은 유망주들, 축구 변방이라 무시받던 미국의 혈기 넘치는 신인선수들이 이 베테랑들과 한 팀에서 만난다. 마치 '탑건: 매버릭'의 루스터(마일즈 텔러)나 'F1 더 무비'의 라이벌 신인 드라이버 조슈아 피어스(댐슨 이드리스)처럼 말이다.
- 충돌과 융합, 그리고 승리: 처음에는 문화도, 스타일도 달라 충돌하지만, 베테랑의 노련함과 신인의 패기가 융합되며 공동의 목표(리그 우승, 월드컵 이변)를 향해 나아간다. 미국은 이 과정을 애플 TV+ 다큐멘터리나 할리우드 영화로 제작해 전 세계에 콘텐츠로 중계된다.
유럽과 남미의 축구는 역사와 전통, 지역 연고, 계급적 감정, 종교적 열정 위에 서 있다. 유럽의 수많은 명문 구단은 19세기 후반 철도 노동자, 조선소 노동자, 광부, 공장 노동자들이 고된 노동을 마친 뒤 만든 공동체에서 출발했다. 주말 경기장은 억눌린 감정을 분출하는 성소였다. 남미의 축구는 또 다르다.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한 빈민가에서 축구는 유일한 탈출구이자 구원처였다. 축구는 그들의 삶 자체였다.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미국은 유럽식 지역 정서의 축구도 아니고, 남미식 빈민가의 구원 서사도 아니다. 미국의 정체성은 비교적 짧은 역사 속에서 형성된 아메리칸드림에 있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이민자도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낯선 땅에서도 새로운 삶을 만들 수 있다.
그렇기에 미국이 유럽과 남미의 축구 정체성을 그대로 가져온다면 감정적 동기화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이민자들의 서사와 연결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금의 손흥민이 만들고 있는 이야기 그리고 회복
손흥민을 예로 들어보자. 이미 미국에는 많은 한인 이민자가 있고, 유학과 출장, 사업을 통해 미국에 머무는 한국인도 많다. 이들이 미국에서 가지는 경계선의 정체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MLS에 손흥민의 등장은 어떨까? 유럽 축구의 중심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득점왕을 거머쥐며 온갖 편견을 깨부순 손흥민이라는 베테랑 서사는 단순한 축구 선수를 넘어 미국의 한인들에게 강력한 구심점이자 페르소나가 될 수 있다. 여기에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인 유망주, 혹은 주류 사회의 미국인 신인이 손흥민과 충돌하고 화합하며 우승이라는 공동 목표를 달성한다면, 그것은 가장 미국적인 가치의 재현이 된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낯선 땅에 온 사람도 이 사회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아메리칸드림의 가장 이상적인 구현이기 때문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의 박지성을 떠올려보면 이 구조는 더 선명해진다. 박지성은 영국 내 한인들의 구심점일 뿐 아니라 한국을 프리미어리그와 동기화시키는 강력한 매개였다. 다른 아시아인들 또한 박지성을 보며 자신을 유럽 최상위 리그에 대입할 수 있었다. 이 관점이 유럽,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 축구를 사랑하는 모든 국가와 미국에 자리 잡은 이민자 공동체로 확장된다면 MLS는 매주, 매년 열리는 미국 주도의 미니 월드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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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서사는 이민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미국인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 이후 미국 사회는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화, 이민자에 대한 배척,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로 몸살을 앓아왔다. 그리고 최근 미국 사회에서는 정치 성향을 가리지 않고 반복되는 말이 있다.
"지금 미국은 내가 알던 미국이 아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지만 많은 미국인들은 과거 자신들이 믿었던 기회의 땅 미국이 약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아메리칸드림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낯선 사람이 이 사회에 들어와 노력하고, 충돌하고, 인정받고, 결국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의 미국은 그 이야기를 잃어가고 있다. 벽을 세우고, 서로를 의심하고, 이민자를 배척하고, 정치적 진영에 따라 같은 나라 사람을 적으로 바라보는 미국은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미국과 다르다. 그렇기에 미국에게는 이 혼란을 긍정적으로 치유해 줄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축구는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축구는 미국 내부의 이민자 공동체와 전 세계의 감정이 동시에 연결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이 모습이 가장 부러울 국가, 중국
중국은 오랫동안 강한 축구 국가를 꿈꿨다. 중국은 시진핑 주석의 주도하에 '월드컵 개최 및 우승'을 목표로 '축구몽(축구의 꿈)'을 선언하고, 광저우 헝다를 필두로 한 수많은 클럽에 천문학적인 자본을 투입했다. 헐크, 오스카 같은 남미 · 유럽의 톱클래스 스타들을 돈으로 사 왔고, 심지어 외국인 선수들을 대거 귀화시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중국 축구(CSL)는 철저히 공산당 정부 주도의 국가주의적 통제 속에서 움직였고 그 안에는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할리우드식 언더독 서사'도, 자발적인 문화적 멜팅팟도 없었다. 결국 부동산 경기 침체와 부패, 그리고 '이야기(Story)'의 부재로 인해 중국 프로축구는 리그 자체가 공중분해되며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중국 또한 미국만큼이나 56개 민족으로 이뤄진 다민족 국가다. 하지만 그건 ‘국가의 강한 권력과 물리적인 힘(통제)으로 묶어둔 인위적인 다민족’이기에 '미국의 아메리칸드림'처럼 이어질 연결 고리가 없다. 중국은 그렇기에 스포츠를 통해 간절히 '하나의 중국'을 만들고 심지어 월드컵이란 국제대회에서 결과물을 만들어 다민족으로 쪼개져서는 안 되는 서사를 만들고 싶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실패했다. 그런데 만약, 미국이 이 서사를 문화적·상업적으로 보란 듯이 성공시킨다면 어떨까? 그 과정에서 미국 내 재미 중국인(화교) 유망주가 MLS에서 성장해 우승의 주역이 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만큼 중국의 체제와 자존심을 통째로 허물어뜨릴 치명적인 순간은 없을 것이다. 참고로 지금 넷플릭스를 비롯한 서구 미디어 플랫폼은 중국 본토에서 서비스되지 않는다. 철저한 통제를 뚫고 VPN을 통해 우회하여, 미국의 시스템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재미 중국인(화교) 유망주의 모습을 지켜볼 본토 중국인들은 과연 어떤 심정일까?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축구를 키우려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면 미국의 진짜 목표는 축구 자체가 아닐 수 있다. 축구는 수단이다. 그들이 정말 만들고 싶은 것은 새로운 아메리칸드림 일지도 모른다.
월드컵 주제곡 → MLS → 이민자 공동체 → 지역 연고 → 미국식 영웅 서사 → 문화 플랫폼 → 아메리칸 드림
이 모든 것의 연결을 위해서 북중미와는 동떨어진 한국인 이재의 등장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연결이 완성되는 순간, MLS는 단순한 스포츠 리그가 아니라 미국이 다시 한번 자신이 어떤 나라였는지를 이야기하는 거대한 문화 플랫폼 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나라였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되고 싶은가.
* 이미지는 구글 검색 입니다(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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