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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s/영화

설국열차

by cfono1 2013. 8. 4.











* 스포일러가 풍부합니다. 하지만 이런 배경을 가지고 보는 것도 재밌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생각의 꺼리가 있는 영화니까요.



한 열차가 쉼 없이 달린다. 인류가 온난화를 없애고자 만든 CW-7의 실패로 인해 빙하기가 도래한 날부터... 그렇게 달린 지 이미 18년이다. 1년 동안 정해진 전 세계의 코스를 달린다고는 하지만 빙하기가 온 지구로 인해 북극을 계속 달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100량이 넘는 이 길고 긴 열차는 자급자족을 위한 설계로 인해 농사와 양식장, 가축 생산 등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런 보호처에 모두가 환영받으며 탑승한 것은 아니다. 예기치 못한 기상이변을 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열차에 그저 몸을 맡겨야 했고 결과는 최하층 민의 삶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18년을 달렸다. 매일 나오는 단백질 덩어리, 궁핍한 삶... 이제 끝내고 싶다. 그 행동의 최선봉장에 커티스가 있다. 그렇게 그는 행동에 옮긴다. 이 열차의 심장 엔진을 장악해 이 구조를 끝내겠다고 말이다.



이 영화는 매우 정치적이며 현실적인 문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우리가 겪는 세계 그 자체다. 


윌포드는 기차의 절대자로 끊임없이 자신의 관대함과 엄격함, 그리고 절대자로서의 자신의 논리를 설파한다. 이 빙하기에 너희가 갈 곳은 없다. 나의 자비로 너희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충성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충성의 대가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라는 것. 영화 후반부에서는 이런 자신의 신적인 사상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열차는 알게 모르게 약화되고 있다. 그리고 없어지는 부품을 대신할 새로운 부품도 필요하다. 이 열차를 지키기 위해서는 적절한 인구수 조절은 필수다. 그런데 산아제한은 인구조절이 너무 느리다. 빠르면서도 열차에서 자신의 주도권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그가 선택한 것은 폭동이다. 


폭동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의 하층민을 빠르게 줄이면서 그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권력을 과시한다. 그리고는 아쉽지만, 이것이 열차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며 정당화하는데 마치 맬서스의 인구론(링크)과 맞닿아 있다. 그러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윌포드를 숭배하는 조기교육과 폭동의 시나리오는 감초와 같은 역할이다. 조기교육이 강할수록 맹신도 강해지고 폭동의 시나리오가 극적일수록 권력의 쟁취 감동 또한 극적인 선전물이 된다


길리엄은 그런 윌포드에게는 필요악 같은 존재다. 꼬리칸 하층민에게는 성자와도 같은 존재다. 반란군에게 성자라면 계엄군 같은 지배 계급에는 악마나 다름없다. 하지만 길리엄은 윌포드의 내통자다. 열차 초기 사람들은 인육을 먹었다. 이 생지옥을 끝내기 위해 길리엄은 팔과 다리를 내놓으며 겨우 꼬리칸 사람들의 인간성을 회복시켰다. 그런데 그 다음은? 이렇게 인육을 기부하는 사람에게 의지할 것인가? 그 순간 윌포드의 단백질 음식이 제공된다. 인육을 먹는 야만의 시대는 사라지지만 이제 윌포드에 의해 조정 당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길리엄은 폭동의 정신을 끊임없이 불어넣고 윌포드는 이것을 적절히 이용한다. 그 과정에서 꼬리칸은 최소한의 사회성은 유지되고 윌포드는 열차 전체의 권력을 놓지 않는다. 


이런 그의 과거는 어두운 민주화 과정과도 같을 것이다. 사회 시스템이 단칼에 무너질 것이 두려워 역사 청산을 단칼에 이뤄내지 못하고 그들과 타협하며 점진적으로 나가고자 하는 고뇌말이다. 누군가에게는 답답하지만 길리엄 또한 바깥의 빙하기 공포를 너무나 뼈저리게 느끼기에 윌포드가 허용한 선까지만 나아간다. 하지만 반란의 리더 커티스에게 윌포드의 말을 믿지 말고 혀부터 뽑으라는 그의 말에서 자신의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과 회한, 그리고 자신처럼 윌포드와 타협하지 말 것에 대한 당부가 읽힌다.


커티스는 열차 초기의 인육을 먹었고 먹는 것을 본 생지옥을 경험한 사람이다. 더는 이걸 두고 볼 수 없다. 그래서 기꺼이 반란의 두목이 되어 열차를 장악하기로 한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전해져오는 힌트는 더욱 그의 희망을 불태운다. 그렇게 감옥칸, 식량칸, 물저장칸 등 차례차례 앞으로 나아간다. 친동생 같은 에드가가 죽는 한이 있어도 멈출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티스는 없어지고 꼬리칸 사람들의 의지만이 남는다. 


그러나 이 과정이 모두 윌포드의 사회 순환 과정임을 알게 될 때 절망한다. 희망을 살릴 힌트를 줬던 것도 그런 판단의 배경을 만들어준 것도 모두 윌포드의 목적을 위한 과정일 뿐이다. 자신이 한 행동이 꼬리칸을 위한 것이 아닌 윌포드의 목적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때서야 그는 남궁민수의 선택에 눈이 뜨인다. 



남궁민수는 열차의 외로운 존재다. 1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열차에서 생존한 사람들에게 이미 열차는 세상의 전부다. 마치 유리 벽에 갇힌 벼룩이 자신의 한계를 낮춰버리는 것처럼. 그렇기에 아무도 열차 밖의 세상을 꿈꾸지 않는 사람들에게 열차 밖의 세상을 꿈꾸는 남궁민수는 크로놀에 중독된 보안 설계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꿈꾸고 있다. 열차라는 제로섬에서 서로 잡아먹는 것이 아닌 제 3의 길을 말이다. 


그러나 이 길은 '열차 안'에서의 혁명이라는 명분을 가진 커티스와 '열차 안'의 절대자로서의 권력을 놓칠 수 없는 윌포드 모두에게 '열차 밖'이란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대안이다. 



어떤가? 우리 사회 아닌가? 어떤 사안에 대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프레임을 짜고 그쪽이냐 이쪽이냐의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 제 3의 길은 미친 놈 취급하는 사회. 지금의 우리 모습 아닌가? 더욱이 바퀴벌레를 갈아 만든 단백질 덩어리라도 주는 것이 어디냐면서 자신의 권력에 대해 정당성을 주장하는 모습에서는 배고픈 거 해결해줬으니 독재라도 감지덕지로 여기라는 모습과 너무 닮았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형벌을 보자. 이 형벌은 꼬리칸 사람들의 심리적 불안감과 무기력함을 아주 극적으로 높이는 효과를 한다. 아이를 빼앗기자 신발을 던져 대항한 앤드류에게 열차 밖으로 팔을 내놓게 한다. 당연히 그 팔은 아주 꽁꽁 얼어 버리고 그 팔을 쇠망치로 깨버린다. 그냥 벌칙이 아니다. 열차 밖의 처절한 환경을 알리고 그 환경으로부터 지켜주고 있는게 누구인지 알려주는 목적 또한 똑똑히 되새기는 효과가 있다. 잔인함으로 인한 공포는 물론이고 말이다. 영화 뿐일까? 냉전시대에 공산주의로 부터 지켜준다는 것을 명분으로 독재를 정당화한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 재물을 위해 멀쩡한 시민을 잡아다 빨갱이와 간첩으로 만들었다.


그 뿐만 아니다. 용역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에 열차에서의 손도끼 폭력 해결사들은 결코 현실과 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철저히 꼬리칸은 게으르고 무능력해서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을 유지해주시는 위대한 윌포드 님이라는 조기교육을 통해 위대한 사상전사로 개조된 아이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북한의 모습만 보이나? 침략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의 모습도 그리고 민주화를 그저 빨갱이에 환장한 무리의 폭동으로 둔갑시키며 독재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가? 


영화 마지막 열차는 결국 붕괴된다. 열차 안에서의 싸움만 가지고는 애초부터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원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열차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을 놓치기 싫었던 사람과 그 속에서만 해결하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을 뿐이니까. 이 영화의 메시지는 그런거 아닐까?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이 미친것은 아니다. 이런 거 말이다. 우리가 하려는 것이 문제 해결이지 문제 유지를 통한 권력 싸움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난 이런 관점에서 설국열차를 괜찮게 보았다. 어찌보면 퍼시픽 림 같은 영화와는 극과 극의 영화인 것이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그런 영화...


다만 아쉬운 것은 좀 더 규모가 컸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100량이 넘는 거대 열차의 이야기치고는 소박했고 각 열차의 칸을 넘어갈 때마다 긴장감이 더 유지되었다면(마치 미션 임파서블에서 임무를 하나 끝낼 때와 같은 해결과정말이다) 마지막 감독의 의도 또한 더 선명해지면서 이런 생각의 꺼리 말고도 시각적 즐거움도 같이 주는 그런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러나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그 배우들 모두 모으고 체코에서 찍으면서 400억 들었다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보고나면 유쾌하거나 흥겹지는 않다.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할 꺼리를 좋아한다면 괜찮게 볼 영화가 되겠고 시각적 즐거움을 중요하게 여기거나 데이트 용이라면 피해야 할 영화가 될 듯하다.




* 이미지는 다음 영화입니다(링크)


* 쓰고나니 엄청 긴 글이 되었네요^^


* 열차의 성자 길리엄의 존 허트 혹시 아세요? 브이 포 벤데타의 서틀러 의장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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