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왕은 왕이 되고 난 뒤 갑자기 귀가 길어져서 나귀 귀처럼 되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왕의 두건을 만드는 복두장(幞頭匠)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이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다가 죽을 때가 되어 도림사 대나무숲에 들어가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와 같다"고 외쳤다. 그 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가 서로 부딪치며 그런 소리가 났다. 그러자 왕은 대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수유를 심게 했는데, 그 뒤로는 "우리 임금의 귀는 길다"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한국에서만 내려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에도 있을 만큼 고전적인 동화다. 그만큼 익명에 대한 욕구는 오래된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속 시원히 말하고 싶은 욕망 그리고 자신의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구 이것은 과거와 현재를 비롯해 미래에서도 사람이라면 느낄 기본적인 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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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많은 SNS 기업들이 자유와 편의성을 이름으로 간단한 가입을 지원한다. 휴대폰 인증이라는 수단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이메일 하나만으로 가입이 되며 그 결과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SNS의 익명은 해방의 장소다. 물론 공간이 과거 임금님 귀를 외쳤던 복두장처럼 해방의 장소가 될 수도 있다. 스트레스를 풀면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고 자신의 원래 생활을 버티는 힘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익명이라는 장소가 제공하는 왜곡된 정보, 거짓된 정보의 피해 및 범죄의 수단 등 악영향이 있음에도 존재할 수 있는 긍정적 기능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익명의 장점도 허용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SNS 기업이 허락하는 선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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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기업에서 네트워크는 곧 돈이다. 사용자 개인이 각자 혼자로 남아서 일기장처럼 쓰는 건 곤란하다. 사용자 간 교류가 일어나야 하고 그 연결이 네트워크가 되어 더 많은 트래픽이 일어나야 한다. 그렇기에 자꾸 친구를 추천하는 것이다. 또한, 공통의 관심사라고 주장하며 큐레이션 콘텐츠라고 들이미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익명의 원래 목적이자 긍정적인 측면과도 맞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익명은 말 그대로 익명 즉, 내가 누군지 몰라야 한다. 그런데 SNS 기업은 그렇게 놔두질 않는다. 굳이 찾아내어 이 사람이 널 알고 있을 것 같아라고 추천한다. 그러나 그 인연이 좋은 인연인지 아닌지는 관심이 없다. 그저 계산된 결과를 끊임없이 제시할 뿐이다. 이렇게 반강제적으로 혼자만의 영역에서 개방된 영역으로 끌려 나오게 되면 익명에 의지해 자신만의 공간을 찾고 싶었던 사용자는 결국 갈 곳이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용자의 선택권은 물론 없다.
정부의 검열에 SNS 기업은 분연히 개인의 자유를 말한다. 하지만 그 자유는 기업의 돈 앞에서는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점점 줄어가는 사용자의 선택권과 알아서 해준다는 서비스의 명분 앞에 자신을 진정 사용자라 불릴 수 있는 어디까지일지 궁금해진다.
* 이미지는 구글 검색입니다(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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